3. 너와 달리기
- Editor G

- 2021년 1월 23일
- 4분 분량
사람은 각자의 삶의 속도와 방향대로 걷는다. 나와 방향이 비슷한 이를 만나 같이 걷고, 갈림길에서 헤어지고, 우연히 다시 마주치고, 언젠가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나와 같은 곳을 향해 따로 또 함께 걸어온 누군가를 만나기도 한다. 사랑은 이러한 여정 속에서 서로 다른 목적지를 가진 사람들이 단 하나를 바라보게 되는 특별한 경험이다. 꼭 보폭을 맞춰 걷지 않더라도, 누군가 앞서고 뒤처지더라도 같은 방향을 바라볼 테니 꽤나 애틋한 일련의 과정이다.
그리고 때때로, 엉망진창 갈 지(之) 자로 걷던 나를, 방향감각을 잃어 헤매던 나를 일으켜 세우고 바른 한 발 내딛게 하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늘 같은 속도로 걷기만 하던 나를 전속력으로 뛰게 만드는 사람과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의『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생소할 감정인 사랑을 말하는 책이다. 오늘 이야기할 챕터 14, 「“나”의 확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7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 저녁, 우리는 포토벨로 로드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날이어서 종일 하이드 파크에서 일광욕을 하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5시 무렵부터 나는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집으로 가서 이불 밑에 숨고 싶었다. 오래 전부터 일요일 저녁이면 우울했다. 죽음, 끝내지 못한 일, 죄, 상실이 떠올랐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클로이는 신문을 읽었고, 나는 창 밖의 차량과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클로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너 또 길 잃은 고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네.”전에는 아무도 내 표정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지만, 클로이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그 말이 그때까지 내가 느끼던 혼란스러운 슬픔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되면서, 내 우울도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 말 때문에, 내가 스스로 정리할 수 없었던 느낌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녀가 기꺼이 내 세계로 들어와 나대신 그것을 객관화해주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강렬한 [그리고 어쩌면 균형이 잡히지 않은] 사랑을 느꼈다. 고아에게 고아라고 일깨워줌으로써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142-143)
클로이는 좋은 기운에 둘러싸여 있다가도 갑작스레 우울증에 빠져든 나를 어떤 언어적 단서 없이도 파악해낸다. ‘괜찮아질 거야’ 따위의 위로의 말은 전혀 없지만 나는 위안을 얻고 사랑을 느낀다. 누군가가 나를 확인하는 행위로 하여 위로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랭 드 보통은 나를 잘 아는 사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나에게 제공하는 윤곽으로 온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덧붙인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 주변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고도 말한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의 역사를 수도 없이 말해주었는데도 우리가 결혼을 몇 번 했는지, 자식이 몇 명인지, 우리 이름이 브래드인지 빌인지, 카트리나인지 캐서린인지 자꾸 잊어버리는 [우리도 그들에 대해서 똑같이 잊어버린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마음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새겨두고 있는 사람의 품에서,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 (144)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나를 봐주는 사람. 내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그 발음을 잊지 않기 위해 되뇌는 사람. 나를 기억하는 사람. 이런 나지만, 이런 나라서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 그의 시선을 주욱 따라가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내게서 그 애정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균형감각을 얻는다.
그리고 여기 그 사랑을 증명하는 ‘펀치 드렁크 러브’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배리.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배리는 위로 누나가 일곱에, 대인기피증, 분노조절장애 증세를 겪고 있다. 영화는 배리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반영하듯 온갖 색과 음성의 무작위 연속이다. 혼란스럽고 어지러우며, 이상하다. 그러나 어느 한구석에서 사랑스럽다는 연상이 계속하여 떠오른다.
마일리지를 적립해준다는 한 식료품 회사의 마케팅으로부터 허점을 발견해 초콜릿 푸딩을 모으며 “푸딩만 사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어”라는 야무진 생각을 하는가 하면, 뜬금없이 제 앞에 놓인 풍금을 조심스레 잡아보고, 눈에 띄는 파란 정장을 갖춰 입고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터트리기도 한다. 어딘가 위태로운 배리의 레이스는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레나가 등장하며 판도가 뒤집힌다. 둘은 어느 날 아침 도로에 떨어진 풍금처럼 갑작스럽고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진다. 배리는 숨고 감추는 일에만 능숙한 사람이었으나 레나를 만나 드러내고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된다. 그녀로부터 걷고, 달리는 법을 배운다.
‘입 맞추고 싶었어요.’ 한 마디에 미로 같은 아파트 복도를 달리고 달려 너에게로 가는 일. 단지 보고 싶단 이유로 네가 있는 하와이로 훌쩍 떠나버리는 일.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 흔쾌히 발을 맞춰주는 너. 그리고 그런 너와 사랑하는 일. 조심조심 걷다가도 숨을 헉헉대며 달리는 일. 다음 발자국이 뜀박질이 될지도 모르지만 두렵지 않은 이유는 넘어지더라도 함께해줄 당신이 내 옆에 있기 때문이겠지. 마일리지를 준다는 푸딩이 날 두근거리게 하는 이유는 세상 어디든 함께하고 싶은 당신이 내 옆에 있기 때문이지.
배리는 마침내 말한다. ‘이런 나예요’ 레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한 품 가득 안아줄 뿐이다.
누군가는 확인을 필요로 하는 사랑을 두고 완벽하지 않은 관계라 말할 수도 있겠다. 결함 있는 사랑은 불안하고, 근사하고, 눈부시다. 어설프고, 다채롭고, 찬란하다. 위태롭고, 알뜰하고, 야무지다. 이상하고, 사랑스럽다. 어떤 단어로 꾸며내도 새삼스럽지 않은 이 사랑을 보자면 그런 말은 바보 같이 느껴진다. 완벽하다는 말로 가두기보단 모든 수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유연한 사랑이 더 낭만적이지 않은가? 서로를 성숙시키며 고운 빛깔로 무르익어가는 과일 같은 사랑, 초 단위로 순위가 뒤바뀌는 단거리 경주보다 마지막 지점을 통과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마라톤 같은 사랑에 마음이 가지 않는가?
나의 미성숙과 불안정함까지도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라면, 나도 뚜벅뚜벅 성큼성큼 잘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걸 잊고 달려 봐도 괜찮을 것 같다. 누군가를 제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있는 힘껏 만끽하기 위함이니까. 우리 모두는 달리기, 그러니까 가슴이 터지도록 달려보는 빛나는 경험 덕에, 끊임없이 나를 확인하고, 내가 멈추든 갑자기 뛰어가든 기꺼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누군가 덕에 살아볼 용기를 얻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사랑을 믿는 게 아닌가 싶다.
당신이 오늘 읽어야 하는 책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당신에게 오늘 추천하는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 (2002)
Playlist
존 레전드, U Move, I Move
강수지, 보랏빛 향기
델리스파이스, 달려라 자전거
혼네, Just Dance
토이, Silly Love Song
전기뱀장어, 널 향해 달리기
데이식스, 그렇게 너에게 도착하였다
콜드, Sunf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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