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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택의 자유가 지닌 무게

  • 작성자 사진: Editor J
    Editor J
  • 2021년 1월 18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8일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 보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초점인 듯 초췌하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 바닥을 반듯이 받들어 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 머리를 갑박이 나려 누르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마는 내막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도무지 자유스럽지 못하다. 다만 나는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 허공에 부유하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루살이처럼 경쾌하다면 마침 다행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구나!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과 프로그램을 구분짓는 것이 '선택권'이었듯, 인간과 다른 생물 간의 가장 큰 차이가 뭐냐 묻는다면 답은 선택의 자유라 할 것이다. 인간에겐 개인의 행동과 가치관을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이 특권을 이용해 인간은 매순간 크고 작은 선택을 하게되고, 이 선택들이 축적되어 개인, 그리고 삶이 형성된다. 즉, 인간은 최소한의 규제 속에서 본인이 원하는 길을 개척해나가는 자유로운 존재인 것이다.


허나 '나'는 이 자유로 인해 오히려 자유스럽지 못하다고 한다. '나'를 짓누르는 것도, 받춰주는 것도 없는 무()의 상태가 본인을 하루살이처럼 허공에 부유하는 한 점에 지나지 않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축복이라 불릴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나'에게는 억압이 된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 동이 어디냐, 서가 어디냐, 남이 어디냐, 북이 어디냐," 지금 화자가 우두커니 서있는 이곳은 닭이 어둠을 쫓아 새벽이 온다한들 암담함이 가시지 않는 한밤중. 어디를 향하든 암담함이 드리운 가랑지길에서 화자는 선택을 하지 못해 고뇌한다. 더 나아가 행동의 자유가 없는 나무를 동경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랑을 자랑치 못함에 뼈저리는 듯하다"고 말한다.


―보다 나무는 행동의 방향이란 거추장스런 과제에 봉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든 우연으로서든 탄생시켜준 자리를 지켜 무궁무진한 영양소를 흡취하고 영롱한 햇빛을 받아들여 손쉽게 생활을 영위하고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뻗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스럽지 않으냐.

선택한 길이 수반하는 대가. 선택의 자유가 지닌 무게. 선택한다는 것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말과 같기에, 그리고 선택함으로써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을 포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에 선택의 무게는 너무나도 버거운 것이다. 어떻게 보면, 끊임없이 선택해야한다는 인간의 숙명은 화자에게 축복이 아닌 저주이다.


선택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영화 <허공에의 질주> 속 대니의 가족이 보인다. 대니와 부모님은 선택에 의해 후회하고, 망설이고, 괴로워하면서도 또 새로운 선택을 거듭한다. 선택이 수반하는 대가를 치르며 허공을 향한 무력한 질주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뇌하면서도 결국엔 갈림길에 놓여 하나의 길을 또 선택해야했던 것이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선택권을 버릴 수도, 선택의 무게를 덜어낼 수도 없다. 화자 또한 선택의 갈림길을 피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밝음의 초점"을 휘잡지 못함에 슬퍼하고 휘잡을 준비가 안 된 자신을 원망하는 것일 거다. 행동해야함을 알지만 대가를 치르기엔 아직 두려운 이 막막한 상황. 사면초가에 놓인 화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난스레 밤하늘의 별에게 선택권을 양보해본다.


"아라!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 보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中 별똥 떨어진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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