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상관없는 거 아닌가?
- Editor J

- 2023년 10월 3일
- 4분 분량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정돈된 것들을 좋아했다. 이를테면 빨주노초파남보 순서에 맞춰 나열된 양말, 주제별로 정리된Why? 시리즈, 과목과 날짜 순으로 분류된 학습지 폴더 등.
이러한 기질에 계획을 세우는 습관이 더해져, 스물 남짓의 나이에는 다소 통제광적인 성향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실수로 플래너를 학교에 두고 온 추석 연휴, 나는 다른 노트에 할 일을 정리하는 게 불안해 발을 동동 굴렀다. 고등학교 1학년, 필기할 때 사용하는 제트스트림 0.38의 잉크가 떨어지는 것을 대비해 리필 두 개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이런 나의 성향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을 땐 최선의 선택에 집착하며 과자 하나도 제대로 못 고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삶이 어떻게 내 마음대로만 흘러가겠는가?
인생의 돌발성은 수많은 노래 가사, 영화 대사, 책 대목의 단골 주제. 여러 창작자들에 의해 같은 주제가 되풀이 되는 것은 그 이유가 있는 법인데.
모든 것을 내 통제 하에 둘 수 없다는 건 (나만 몰랐던)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운이 좋았던 건지 오만함으로 주변을 짓눌렀던 건지 난 이 사실을 스물 하나의 나이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깔끔한 교과서 목차 같았던 학창시절의 울타리를 넘어보니, 살면서 걷게 되는 대부분의 길은 매끈한 포장 도로보단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였다. 이렇게 글로 적어보니 당연하고 시시한 말이지만, 21년을 계획과 통제로 만들어온 내겐 정말 큰 충격이었다…
평생 살아온 방식을 부정당한 후, 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으려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정답인가? 정답인 삶을 살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를 붙잡고 빙빙 돌기만 하다, 답을 갖고 있을 법한 사람을 마침내 찾아냈다.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노래인지 타령인지. 노래하는 듯 말하는 듯 공중을 휘젓고 다니는 아저씨, 라고 하면 연상되려나.
21년, 유튜브를 떠돌다 가수 장기하 씨의 산문집 “상관 없는 거 아닌가?”의 출간 기념 인터뷰를 보았다.
“산문집을 내게 됐어요 (수염 쓱) 그냥 이런 사람이 있다, 라는 걸 보여드리는 것만으로도 사는 데 참고 정도는 될 수 있지 않겠나…”
정돈된 밤톨 머리에 잘 자란 수염. 깔끔한 스트라이프 셔츠와 안경. 소파에 여유로이 앉아 산문집을 낸 계기를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진지하게) 반했다.
왜 책을 내기로 했는지, 무엇을 목표로 글을 썼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태도. 선택의 이유와 생각의 근거를 덧붙이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 내 책은 이런 내용이고 난 저런 사람이다, 와 같은 정의를 내리지 않는 자유로움. 그 무던한 모습에서 초월적인 여유를 느꼈다. 문득 이 사람의 삶을 따라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이 길이 내 길인 줄 아는 게 아니라 그냥 길이 있으니까 가는 거야”
답을 찾았다는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막상 재생한 노래의 가사는 나를 조금 억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떤 길을 가야할지 선택하지 못해 힘든데 이 사람은 뭐 이리 초연한 말을 하나.
“니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나는 별일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분하기도 했다. 나는 걱정을 덜고자 계획에 집착해왔는데, 이 사람은 왜 걱정이 없다는 걸까.
내 모든 고민을 초월한 가사들이 마치 날 놀리는 것 같았다. 결국 심통 난 마음 반, 이 사람의 비결을 알아내겠다는 오기 반으로 산문집까지 사버렸다.
책을 구매하며, 장기하 씨라면 뭔가 뾰족한 수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절대적 진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참 어린데, 다시 한 번 변명하자면 난 21년을 이런 태도로 살아왔다.) 당연히 그건 오산이었고, 정답을 찾으려 읽은 책에서 되려 찾은 건 ‘이러나 저러나 명확한 답은 없는 것 같다’는 의견 하나였다. 내가 답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계속해서 물음표를 던지고 있었고, 글로써 흐릿한 생각을 정리하려 하고 있었다.
“[일본 작가 이나가키 에미코의 미니멀 라이프 스타일을 인상깊게 보아 양문형 냉장고를 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한참 밖에 나갔다 들어왔는데 냉동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이었다. … 결국, 새 양문형 냉장고를 주문했다. 역시 나는 이나가키 에미코 작가처럼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좌절을…… 하는 일은 사실 없고 요즘은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냉장고가 이토록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나는 처음 알았다.”
“실질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스타그램 따위는 잊어버리고, 침대에 몸을 기대 좋아하는 책을 집어들어 읽고 싶은 만큼 읽고, 일기장을 펼쳐 내 삶은 대체로 잘 굴러가고 있다고 쓰고, 스탠드 조명을 끈 뒤 그대로 기분 좋은 잠으로 빨려들어가…… 려는 순간 카톡이 하나 온다. 확인하고 나서는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연다. 오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그 모든 생각을 또 한번 되풀이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저 사람은 농담을 잘하는데 왜 나는 못할까, 저 사람은 턱선이 날렵한데 왜 나는 둥글까,”
책을 마친 난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정답 찾기에 철저히 실패했음을. 그렇다고 좌절하진 않았다. 되려 이상한 개운함을 느꼈달까?
“그런데 애초에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진다. 내 힘은 어차피 별로 세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무력감을 느낀 것이 머쓱해지기도 한다. … 딱 두 번 해봤을 뿐이긴 하지만, 나는 서핑을 좋아한다. 그 어떤 스포츠보다도 정확히 삶을 유비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다 위에서 서퍼가 할 수 있는 일, 딱 그 정도가 세상에서 한 사람이 가진 몫이 아닐까. 서퍼는 바다의 입장에서 보면 먼지에 불과하다. 부표나 지푸라기와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서퍼는 바다 위에서 즐겁다. 바다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도, 작게나마 나름의 역할을 하며 재미를 찾는다.”
“그리고 나에게 달리기는 일종의 명상이기도 하다. 처음 일이 킬로미터 정도까지는 달리는 행위 자체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지만, 그후 어느 순간부터는 팔다리가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뇌도 알아서 움직인다. 나의 생각이 의도적인 노력을 벗어나 그저 냇물처럼 흐르기만 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 자체로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이런저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장기하 씨의 삶을 열심히 엿본 결과, 절대적 진리는 아니지만 모호한 – 답이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 무언가를 여럿 발견했다. 내가 찾은 것들을 애써 말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 같다:
명확한 답은 없음을 받아들인 사람
통제 불가능한 인생을 파도 삼아 서핑하려는 삶
‘상관없다.’의 온점보다 ‘상관 없는 거 아닌가?’의 물음표
열린 결말을 체득할 의지
사실 이러한 발견을 했다고 해서 내 삶의 태도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또 설령 내가 그의 태도를 빼닮는다 해도 모든 고민이 완벽히 해소될 수 없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호한 것들을 알게 된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그 덕에 다른 답을 찾아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또, 통제 불가능한 지저분한 상황에 놓였을 때 이전만큼의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또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가 이어지면 장기하 씨를 따라 내 멋대로 잘라버리곤 한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이렇게 그를 따라 생각을 자르면, 무의식적으로 이 사람의 태도를 답이라 여기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내 행동이 모순적이라는 생각에 또 뭘 어쩌면 좋을지 고민한다. 그렇게 계속 또 한참을 생각하다,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곤 진짜 최종적으로 생각을 끝내려 한다.
‘진짜 상관없는 거 아닌가?’
EPILOGUE나에겐 이상한(?) 취향이 있다. 또래들이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돌, 배우에 열광할 때 나이 있는 아저씨들을 고집하는 이상한 취향. 연륜의 지혜와 여유로움에 대한 동경 + 아날로그 시대를 흠모하는 마음의 결과물인 걸까? 친구들이 최애들의 포토카드를 모으는 동안 나는 여러 분야의 아저씨들을 수집했고, 그렇게 모은 아저씨들을 '아저씨 컬렉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쌓여가는 아저씨들이 많아질수록 그 멤버들을 소개하고 싶단 생각을 종종 했는데, 좋아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쓰다보면 괜스레 낯간지러워져 대부분의 글을 끝내진 못했다. 그렇게 할 말을 쌓아두다보니 컬렉션이 과부하 상태가 되어버려서(...) 이번에 리뉴얼되는 호독을 통해 나눌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장기하 씨가 그 첫번째 에피소드였다! 하하.
언제가 될지 확실한 약속은 못하지만, 이 글을 필두로 사심 가득한 글들을 계속 써보려 한다. 나의 덕질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은 여전히 조금 부끄럽지만 많은 관심을 부탁하며 이 글을 마친다.
진짜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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